묘지(墓誌)로 밝혀지는 신비
문왕의 치세
서기 737년 무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대흠무(大欽茂)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가 바로 발해의 제3대 문왕(文王:738~794)이다. 문왕은 발해 전체 역사에서 거의 1/4에 해당하는 57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문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발해는 본격적으로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고왕(高王:大祚榮)과 무왕(武王:大武藝)은 정복활동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여 국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문왕은 이에 힘입어 나라 안 체제를 정비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개혁 정책의 핵심은 문치(文治)에 있었으며,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당나라 문물(文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유학(儒學)과 불교(佛敎)를 진작시켰다. 이러한 개혁정치는 상경(上京)으로 천도한 후기에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대외 관계에서도 선린우호(善隣友好) 정책을 유지하였다. 문왕 대흠무는 만주 동쪽 지역을 개발하는데 힘을 쏟았고, 755년 도읍을 첫 도읍지인 둔화 시 동모산에서 동북쪽 300리 지점에 있는 상경(上京)으로 옮겨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785년 다시 동경(東京)으로 천도(遷都)하였다. 고왕(高王), 무왕(武王)시기에 확장된 영토를 5경 15부로 62주로 재편하고, 중앙에는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 정당성(正堂省)을 포함한 3성 6부를 설치하였으며, 군사적으로는 10위제(衛制)를 마련함으로서 국가통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762년 당나라는 발해 문왕을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높여 불러 나라 안팎으로 높아진 지위를 인정하였다. 이는 발해가 이 시기를 전후하여 국가 통치의 기틀이 완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길림성(吉林省) 화룡시(和龍市) 용두산(龍頭山)에서 발견된 정효공주 묘지에 의하면 문왕을 대왕(大王), 성인(聖人), 황상(皇上)으로 부르고 있어 고구려를 계승하여 건국이후 반영되었던 황제국(皇帝國), 천자국(天子國)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하게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존호 가운데 사용된 ‘금륜성법(金輪聖法)’은 불교적인 용어로서 문왕이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본떠서 불교의 이상적 통치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을 표방하였던 사실도 보여준다. 그리고 문왕은 대흥(大興), 보력(寶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여 당나라와 대등한 독립국가임을 과시하였다.판을 마련한 위대한 군주였다.
딸을 잃은 슬픔
서기 792년 여름, 문왕의 넷째 딸, 정효(貞孝)가 죽었다. 그녀는 남편과 딸을 잃은 뒤에도 ‘고결한’ 정조를 지키며 살았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컸던가? 그만 서른여섯이란 젊은 나이에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도성(都城)인 서고성(西古城)의 숙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해 겨울, 정효공주는 남편 곁에 묻혔다. 이미 15년 전에 둘째 딸 정혜(貞惠)를 잃었던 아버지 문왕은 조회마저 열지 않고 침전(寢殿: 왕의 침실이 있는 궁궐)에 틀어박힌 채 몹시 비통해했다. 그는 온 나라에 노래와 춤추는 것도 중지시키고 자는 것과 먹는 것조차 잊어버린 가운데 관청에서는 부부합장을 준비했다. 무덤은 서쪽 용두산(龍頭山)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다시 낮은 언덕을 이룬 곳에 있었다. 주변에는 개오동나무가 무성하고 아래에는 강물이 굽이치고 있었다. 사람들의 목메어 우는 소리가 상여꾼들의 발길 따라 머뭇거리고, 영구차를 끄는 말도 뒤를 돌아보며 울부짖는다. 상여꾼들은 무덤 앞에서 잠시 영구를 멈췄다가 해가 떨어진 후 깊고 어두운 무덤 속에 안장했다.